8090 세대라면 잡지 또는 tv 에서 흰색 바탕의 ysl 로고를 세긴 티셔츠에 진을 입고 걷는 모델분을 한번쯤 보셨을까요? 저는 중학생때 처음 이 티셔츠를 보고 ysl이 세로로 겹쳐진 이 로고가 너무나도 세련되어 보여서 프랑스의 하이엔드 브랜드라는 것을 모르고 반해 버렸답니다. 당시에는 비브렌드에서 레플리카(모조품) 으로도 많이 팔렸기 때문에 사고 싶었지만 어렴풋이 이게 어떤 의미인 지 모르고 입고 다니는 게 챙피할까 망설였던 과거가 생각납니다. 브랜드와도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을 쓸 수있다면 그것이 제가 ysl과 사랑애 빠진 첫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2013년,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이브생로랑의 헤드디자이너로 영입되면서 오뜨꾸뛰르에 더이상 오르지 않게된 이브생로랑은, 생로랑 파리로 그 브랜드의 공식명칭을 바꾸고 브랜드의 새로운 이름인 SAINT LAUTENT PARIS라는 글자가 각인된 삭드주르와 같은 라인업의 제품들이 많이 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ysl의 모노그램로고는 생로랑 브랜드의 상징이며, 저를 포함한 전세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선셋, 루루등과 같은 라인업에 제작, 판매되고 있습니다.
입생로랑의 탄생
이브생로랑은 이 브랜드의 창시자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 각광받는 이브 앙리 도나 마티외생로랑 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프랑스 알제리의 한 지역에서 출생한 생로랑은 1936년 태생이며 10살즈음 이미 그는 누이들과 어머니를 위한 드레스를 제작할 정도로 재능을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그가 17살이 되던 해 열린 국제 디자이너 공모전에서 우승을 하며 프랑스 파리의 보그 편집장의 눈에 들게 된 그는 편집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디자인스쿨에 등록을 하고 여기서 본인의 재능을 맘껏 선보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향후 끌로에, 샤넬, 펜디와 같은 굴지의 브랜드 수석디자이너 자리는 역임한 독일출신의 칼 라거필드와 같은 학교 출신이며 당시에는 생로랑이 그를 제치고 당당히 수석 졸업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수석으로 디자인스쿨을 졸업한 생로랑의 작품들이 크리스챤 디올에게 들어가고 그렇게 디올이 생로랑을 디자이너로 영입하면서 본격적인 디자이너로의 데뷔를 하게 되죠. 지금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천재들이 동시대를 살고 또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경쟁과 이끌어줌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 짜릿하고 드라마틱합니다. 그렇게 디올에 영입이 된 생로랑은 디올에서의 2년차 때부터 그의 스케치들을 파리 상류층들을 위한 쇼인 오뜨꾸뛰르에 선보이게 되며 크리스챤디올이 사망하던 해인 1957년에 디올의 수석디자이너 자리에 앉어 빛을 보지만, 이내 1960년 전쟁으로 인해 군에 징집되고 이어 디올의 수석디자이너 자리에서 해임되면서 잠시 방황을 하게 되죠. 하지만 이러한 생로랑이 방황에서 극복하는 순간부터 이브생로랑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생로랑의 천재성은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기도 하고 당시 시대의 비평가들에게 지나칠 정도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분명한 한가지는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 예술가이자 디자이너 였고 그의 마지막은 다소 쓸쓸했고 마약과 술이 함께 하는 나날들도 있었으며 그 끝은 뇌종양이라는 비정한 질병에 의해 2008년 사망에 이르렀지만 그의 생에 어느 한 순간도 재능을 낭비한 흔적은 없습니다. 천재들이 그러하듯 그는 순수했도 누군가의 눈에는 말기의 암 판정을 감내해 내기 힘든 정신력의 소유자 였으며 그렇게 본인의 끝을 혼자만 알지 못하고 병에 의해 사망하는 슬픈 결말을 안게 됩니다. 굳이 글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작품, 옷 그리고 악세서리와 가방 신발등 으로 부터 우리는 그의 철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60년대에 여성에게 처음으로 바지 정장을 멋지게 소화해 낼 수 있는 패션을 선보였고, 그의 로고가 박혀 몸에 흐르는 작품들은 여성스러움 보다는 세련되고 지적여 보이면서 동시에 섹스어필이 될 수있는, 그래서 단번에 중학생이었던 저에게도 그의 옷에서 섹시함을 느끼며 매료될 수 있었던 그런 옷을 디자인 해 냈죠. 그는 기성세대(60년대 이전) 귀족들이 추구하던 엘레강스함 보다는 어필링을 항상 강조했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그의 철학을 우리는 입고 들고 함께 하는 거라 생각되네요. 최근 타 브랜드들과 샤넬, 프라다 등의 본래 입지가 단단했던 브랜드들이 대폭적인 매출 증가를 하는 상황 속에서 그 실적이 눈에 띄지는 않는 생로랑 이지만, 탑모델 최소라, 셀럽인 블랙핑크 로제, 그리고 한예슬 등 한국인 모델들을 채택해 영앤리치 층에 홍보활동을 꾸준히 해 오던 생로랑은 올해 초 한국인 이호진 씨를 모델로 채택해 또 한 번 한국 시장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로, 캐나다 오타와 대학 법대를 중퇴하고 모델의 길을 선택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인데요, 앞으로 이호진씨도 그리고 생로랑의 입지도 함께 올랐으면 하는 바램을 해 봅니다.
이브생로랑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를 통해 이 브랜드의 시작과 한 디자이너의 생애를 함께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명품 브랜드 중에 유일하게 너무나도 사랑하고 선망하는 브랜드여서 이 글에 참 애정을 갖고 썼습니다. 생로랑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저와 같은 분들을 위해 도움되었기를 바라며, 다음글에서 만나요